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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역사서술로서 광해군 읽기 (오항녕의『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본문
오항녕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메타역사서술로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광해군을 통해 근대주의 역사관의 폐해를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좀 더 바른 역사서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이 길게 언급되지는 않으며, 그것도 머리말과 프롤로그에서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나머지 분량은 광해군의 시대를 초기와 중기, 말기로 나누어 그 속에서 “광해군 시대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 사건의 우연성” 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머리말과 프롤로그에서 오항녕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광해군에 대한 역사서술을 통해 역사서술의 방법을 이야기하려는 책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조선시대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대표적인 폭군으로 평가받았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계모를 폐위시켰다는 점, 조선에 재조지은을 내린 명을 외교의 중심에 두지 않고 오랑캐인 청과 손잡으려 했다는 점, 궁궐 증축을 통해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다는 점 등에서 그렇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지나 광해군은 화려하게 복권됐다. 그는 대동법과 중립외교를 통해 조선의 안녕과 안정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를 넘은 새로운 근대로의 시작을 열 수도 있었던 왕으로 재평가된다. 광해군의 업적과 성과보다는 시도에 주목해 근대적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게다가 광해군의 전후 세대의 임금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암군으로 평가받는 선조와 인조였다는 점도 광해군의 재평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에서 오항녕은 광해군에 대한 현재의 긍정적 평가를 비판한다. 광해군에 대한 현재의 긍정적 평가는 근대주의 역사관에 조선사를 억지로 끼워 맞춘 결과라는 것이다. 근대주의 역사관에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필연적이다. 이 점에서 보았을 때, 근대적 가치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중세적 가치와 근대에 대한 반동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광해군이 긍정적으로 재평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동법과 중립외교 등의 정책을 통해 근대로 이행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광해군은 복권되지만, 그의 시대에 수반되는 주자학 등의 조선의 가치들은 대부분 부정된다. 인정되는 것은 ‘근대의 맹아’ 뿐이다.
오항녕은 근대주의 역사관으로 인해 “사회와 경제구조, 농민의 운동, 변혁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긍정적 기능보다는 부정적 기능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부정적 기능 중 가장 큰 문제로 그는 “덮어씌우기 오류”를 지목한다. 그는 지금의 역사서술 방식이 서로 상이한 문명의 차이를 비교해 이야기하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역사서술 보다, 어떤 문명에서 근대성을 발굴하는 동일성에 기초한 역사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한 문명에 다른 문명 발전양상을 일방적으로 덮어씌워 해석하는 서술방식은 폭력성을 수반하게 된다. 이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열의 관계로 배열한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근대성의 표상으로 긍정적으로 기능하게 되자, 그를 반대했던 인조와 서인 세력은 근대를 부정하는 반동세력으로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최선을 다해 당대를 살았던 그들이 근대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아야 할 세력으로 몰려야 하는 것은 가혹할뿐더러 위험한 사고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항녕은 광해군의 사례를 통해 근대주의 역사론이 가지고 있는 의도의 오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의도의 오류란 어떤 행동의 과정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 의도가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면, 행동 자체를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광해군의 대표적 업적으로 인식되는 대동법과 중립외교는 집권 초기에는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으나, 중기와 후기에 이르려서는 유명무실해진다. 게다가 실록은 광해군이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는 대동법의 확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광해군 2년, 경기지방에서만 실시하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해 달라는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의 상소가 올라오자, 광해군은 “다른 도까지 확산하면 분명히 난처한 상황[왕실 재정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애민 개혁 군주인 광해군의 모습과는 동떨어지게 느껴진다. 게다가 광해군 후기에 궁전 증축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고,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세금에 고통 받았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과연 광해군이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좌절한 명군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광해군을 근대주의 역사론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인식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인식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근대주의 역사론에 의거한 역사서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오항녕의 인식은 타당성을 갖는다. 이 과정을 통해 이 책은 단순히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재정립하는 것을 넘어, 역사 인식과 서술에 대한 지표를 주고, 제대로 된 역사서술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지점까지 이른다. 저자가 제목을『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라고 지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광해군이라는 실체를 비추는 인식이라는 거울이 왜곡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지금 인식되는 다른 역사적 사실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역사서술뿐만이 아니라 동일성을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실재에 보다 명확하게 접근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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