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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이야기 -김애란『침묵의 미래』 본문

페미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이야기 -김애란『침묵의 미래』

임주혁 2016. 5. 19. 08:14


페미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이야기

-김애란『침묵의 미래』에 대하여

 

1. 들어가며

페미니즘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참 곤욕스럽다. 단순히 번역어로 여성문학, 차별받는 여성을 다룬 문학작품이라 정의 내려버리면 간단할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즘 문학의 범주를 단순히 ‘여성’이라는 하나의 코드만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여성’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차별’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박경태는 소수자를 ‘신체적 또는 문화적 특징 때문에 사회의 다른 성원에게 차별을 받으며, 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린다. 여성들은 세상의 절반을 이루지만, 남성 또는 같은 여성들에게 차별받고 구분지어지기 때문에 소수자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내에서도 다른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억압적 현실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만을 담는다고 생각되던 페미니즘 문학을 억압 받고 소외받는 이들을 다루는 문학, 소수자를 다룬 문학으로 범위를 확장시켜 정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김애란의『침묵의 미래』는 사멸해가는 언어를 화자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소수언어박물관에 갇힌 언어는 자신과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해 나지막하게 하지만, 자신과 그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분노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언어는 인간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결정한다. 즉 인간을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보았을 때 소수언어박물관에서 보호되는 소수언어와 사람들은 하나의 마이너리티다. 주류에 밀려 보호라는 이름 아래 갇혀 버린 존재들 말이다. 여기서 보호란 차별을 전재한 것이다.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보호받는 대상이 보호하는 대상보다 약하고 열등함을 전재하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이 드러나는 소수언어박물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소수자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지 살펴본 후, 이를 통해 보호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통해 앞서 이야기한대로 페미니즘 문학이 단순히 억압받는 여성을 대변하는 수준을 넘어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소수를 위한 문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2. 박물관이라는 공간의 상징성

앞서 페미니즘 문학의 정의를 억압받는 소수자를 다룬 문학으로 정의내린바 있다. 이 작품은 사멸해가는 언어를 화자로 놓은 가운데, 소수언어박물관에서 벌어지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 되는 소수언어박물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소수언어박물관은 말 그대로 사멸해가는 소수언어 사용자와 그 말들을 모아놓은 장소이다. 이는 소수언어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곳은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이다. 이곳은 거대한 규모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기념관인 동시에 학습장, 연구소, 민속촌으로도 쓰인다. 정식 이름은 <소수언어박물관>. 지구상에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그 가치를 알린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박물관 부지로 선정된 곳은 ‘중앙’사람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낯선 고장이었다. 붉고 메마른 땅이 끝도 없이 펼쳐진 불모지였다. 중앙의 계획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온갖 중장비를 실은 차량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왔다. 그러고는 뚝딱뚝딱 설은 못질을 하더니 순식간에 모든 공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p.17)

 

박물관이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이며, ‘기념관인 동시에 학습장, 연구소, 민속촌’이라는 설정은 아이러니하다. 기념관과 학습장을 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이라는 말은 시설을 세운 중앙에게 박물관에 놓인 언어가 사용되고 전파되어야하는 말이 아니라, 사어(死語)로 인식함을 알 수 있다. 주류언어를 사용하는 중앙의 입장에서는 이 언어가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보존할 의지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중앙의 생각은 다른 문단에서 드러난다.

 

이곳을 디자인한 이들은 한 부족과 다른 부족 사이에 충분한 공간과 거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존 인구가 총 세 명이 안 되는 나라라고 해도 그들이 수천 년간 쌓아온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쉴 만한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이 필요했다. 이곳이 정말로 무언가를 ‘보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랬다. 비록 실물이 아닌 모형이라는 걸 모두가 자각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너무 가짜의 느낌이 나서는 안됐다. (p.19)

 

이곳을 지은 이들의 목적은 “단지 이를 ‘보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수천 년 간 쌓아온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쉴 만한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이 겨우 박물관의 한 귀퉁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난센스지만, 보존의 목적이 단순히 보여주기에 있다는 사실은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소수자들에 대한 시선과 묘하게 겹쳐진다. 그들은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말하며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고 사회와 격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우리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시선과 처우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박물관의 기능은 중앙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중앙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 곳곳의 언어를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그 반대였다. 그리고 그건 중앙이 내심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두 기획된 거였는지도 몰랐다. (p.20)

 

소수언어가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중앙이 사용하고 있는 주류언어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 중앙은 관대한 이성으로 소수언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권위에 위협이 되는 소수언어를 한 곳에 모아놓고, 사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하거나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우는 것은 권위에 대한 위협을 체면을 세우면서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3. 박물관 속의 소수자들

격리와 차단이라는 박물관의 기능은 박물관에 거주하는 소수언어 사용자들을 압박한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고독과 함께 늙어간다. 하지만 이 보호는 소수언어와 그 사용자를 말라비틀어지게 한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대화할 상대가 없는 상황 속에서 소수언어와 사용자는 극심한 고독감 속에 빠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주류와 다른 하나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사물로만 존재하게 된다. ‘살아있는 테이프’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화자가 되는 언어는 이 사실을 담담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내 화자…‥어려서는 달리기를 잘했고 늙어서는 후두암에 걸린 내 화자는 한때 이 소수언어박물관을 탈출한 적이 있는 용감한 청년이었다. 그는 열다섯에 이곳에 들어왔다. 어느 여름밤, 이방인이 건넨 술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여기였다고 했다. 그는 며칠 동안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일단 그가 쓰는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격분하고, 저항하고, 애원하고, 의기소침해하기를 몇 번. 그는 곧 이곳에서의 삶에 적응해갔다 물론 처음 몇 달간은 그도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관람객을 향해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조차 놀랄 만큼 유쾌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군요!’하고. (p.27)

 

박물관에 의해 납치된 소수언어 사용자는 처음에는 저항도 해보고, 애원하기도 했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현실에 결국 적응하고 만다. 현실에서도 많은 소수자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 결코 변하지 않는 사회체제 속에서 소수자들은 결국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거나, 또는 자신의 특성을 장신구 삼아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양태들은 언어는 자신의 고유어를 쓰되, 생활방식은 중앙의 것을 따르게 하는 박물관의 관리에서도 드러난다.

 

기숙사에서는 모두가 공동규칙을 지켰다. 그중에는 소등시간과 취침시간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기념관에 있을 때만 ‘자신’인 척할 뿐, 해가 지면 ‘중앙’식으로 지어진 방에서 중앙 식으로 잤다. 음식도 규격화된 식판에 받아 중앙 식으로 먹고, 용변도 정해진 장소에서 중앙 식으로 봤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앙인’인가 하면 또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단체사진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가는 유령처럼 모호하게 존재했다. 중앙에서는 이들에게 중앙 언어를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의사소통 체계를 통일하면 입주자들을 통솔할 때 여러모로 효율적이지만, 공용어를 바탕으로 이들이 자기들만의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은 각 언어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 민족끼리 말을 섞는 것을 금했다. (p.22)

 

언어는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생각의 형태까지도 규정해낸다. 이를 조금 깊게 생각해본다면 언어란 인간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앙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언어는 고유의 것으로 쓰되, 생활양식은 중앙의 것을 따르도록 한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힌 셈이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성은 흐려질 수밖에 없다. 박물관의 소수언어 사용자들이 중앙인도, 자신이 속한 고유 민족이 될 수도 없이 “유령처럼 모호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인간은 위험하다. 스스로도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불안은 외부로 표출되기도 한다.

 

중앙에서 정해준 매뉴얼대로 십년 내내 웃는 얼굴로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오늘 날씨가 꽤 좋군요!’라고 얘기해온 어느 화자가, 한 날 충동적으로 관람객의 목덜미를 그은 적이 있어서다. 나는 이 야야기를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내 마지막 화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손에는 칼처럼 날카로운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관리자들은 처음에 그게 뭔지 몰랐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것이 그가 속한 부족의 전설과 노래가 담긴 콤펙트디스크라는 걸 알았다. (p.24)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 불행한 사례는 중앙의 획일화된 억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특성대로 살지 못하고 억압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왜 우리가 페미니즘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극복해야만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4. 나가며

이 작품은 현대 사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인간을 소수언어박물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박물관 내의 소수언어 사용자들은 언어를 통해 그들을 관리하는 중앙과 차별되며, 중앙에 의해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의 열세를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중앙의 언어를 배울 수조차 없기 때문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기 정체성 분열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들은 대부분 소수자들의 문제를 아우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 작품의 특성은 확대된 페미니즘 문학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모두 알고 있듯이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은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갈등과 차이, 한 국가 내에서도 물질적·지적 자본의 차이에 따른 위계의 문제, 각 국가별로 가지고 있는 문화적 문제 등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점을 보았을 때 과거 20세기 초반의 페미니즘 운동과 같이 여성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운동을 진행하는 것은 그리 옳은 방향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여성뿐만 아니라 차별받고 억압받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내는 것이 페미니즘이 가려고 하는 방향에 좀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앞으로 페미니즘이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에 대한 방향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페미니즘 문학의 지평을 조금 더 넓혀 독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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