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한달, 일초라도 같이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대분열 본문
성 바울로가 1세기 예루살렘에서 보편교회를 설립한 이래,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통합된 종교를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각지로 전파되면서, 지역의 관습과 양식에 따라 조금씩 변용됐고,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문화, 교파, 철학이 발생하게 됐다. 이러한 분화는 교회의 분열을 가지고 오게 됐으며, 결국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그리스도교는 탄생 이후 3세기 동안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으로써 제국의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때 3개의 대교구가 존재했는데 베드로와 바울로가 순교했던 로마교구와 알렉산드리아 교구, 안티오크 교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로마 교구의 주교는 스스로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세 교구중 가장 중심적 역활을 담당했다. 게다가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로마교구의 세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고, 비잔티움의 주교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승격시키면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간의 정치적 긴장이 조성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은 문화적 차이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로마에서는 교리에 대한 논쟁이 신자와 성직자를 가릴 것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서로마에서는 정통 신앙이라는 교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두 교회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 처해있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동로마는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학문적 종교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웠지만, 서로마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잦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어 있었으며, 동로마만큼의 물적·인적 자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로마는 정통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이민족을 감화시키려고 했고, 다양한 논의를 진행했던 동로마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종교적 권위를 어느 편이 가지느냐와도 연관된다. 로마교구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을 중심으로 교회의 모든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들은 공의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 논쟁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한 공식적 언명 문제가 있다. 본래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언명하였지만, 서로마 교회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동방교회가 보기에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이를 관철시켜 사용했고, 이러한 논쟁 속에서 두 교회의 교리 논쟁은 심화되어 갔다.
결국 이렇게 교리의 차이가 심화됨에 따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의식 또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빵의 종류나 토요일마다 단식을 실천하는 것, 이미 결혼한 남자가 신부가 되는 것 등의 정당성 등이 논의 됐다. 결국 이러한 갈등 끝에 로마 주교인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주교와 성직자들을 파문시킨다는 문서를 보냈으며, 이 결과 두 교회는 분열되고,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이라는 당당한 이미지는 산산이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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