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한달, 일초라도 같이 하지 않는다면
끝내 풀리지 않는 인간 사이의 갈등에 대한 드라마(한태숙의『안티고네』) 본문
연극『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3대 비극 중 하나로, 현대에도 계속해 재탄생되고 있는 작품이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한태숙 연출의『안티고네』는 이러한 원전의 주제의식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평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는 안티고네와 법의 정의를 주장하는 크레온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갈등구조는 소포클레스가『오이디푸스 왕』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인간이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과의 싸움이 아닌, 개인이 스스로 따르기로 결정한 가치를 서로에게 강요하고, 이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는 점에서 좀 더 현실과 가깝게 보여 진다. 도둑처럼 다가오는 비극적 사건은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현실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비극과 다른 층위에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을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통해 관객에게 느껴지게 되는데,『안티고네』는 사건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기 보다는 인간이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 갈등 상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티고네와 하이몬, 유리디케의 죽음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의 주된 갈등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가치관의 싸움이며, 앞서 말한 이들의 죽음도 운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오이디푸스 왕』처럼 항거할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하다 패배한 인물을 통해 느껴지는 연민과 공포를 이 작품의 관객들은 느낄 수 없다.
한태숙의『안티고네』는 원전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주제의식을 더욱 크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원전과 큰 차이를 보인다. 한태숙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주제의식과 코러스의 활용, 큰 줄거리, 가면 분장 등의 원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뼈대만을 유지한 채로 연출가의 재량에 따라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극본의 수정이다. 우선 첫 부분에서 원전은 코러스가 등장해 상황과 등장인물들을 소개하지만, 한태숙의 것에서는 격렬한 춤사위와 함께 등장한 코러스의 대화를 통해 갈등이 시작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주를 통해 단순히 설명으로 시작하는 밋밋한 장면 대신, 영원히 갈등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첫 장면부터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용은 처음부터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키고자하는 연출자의 의도가 묻어나 보인다. 또한 원전에서는 안티고네와 유모, 안티고네와 하이몬 등의 대화가 등장한다. 하지만 한태숙의 작품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원전에 나오는 내용들이 모두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을 보여주는 대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태숙의 결말에서는 크레온이 아들과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홀로 남아있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데, 원전에서는 크레온이 충격을 받지만, 내각회의에 참석하러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대본의 차이는 고대와 현대의 사람들의 반응의 차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극본의 번역을 맡은 강태경은 “문학 번역자라면 ‘있는 그대로’ 번역에 임할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을 전제로 한 번역이란 그럴 수 없다. 관객과의 일회적 만남에서 승부를 갈라야 할 공연대본은 숙고된 ‘문학적 가치’와는 별도로 즉각적이면서도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러닝타임 내에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해야만 했고, 즉각적이고 일회적 자극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인물들 간의 다양한 대화를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일이 힘들다는 점 때문에 극본이 상당 부분 수정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무대 구성이다. 원전이 창작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연극은 야외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이었기에 실내에서 공연되는 현대연극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태숙의 무대는 경사진 언덕을 사용하며, 빛과 그림자를 사용해 공간을 분할하기도 하며, 지하 동굴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에 물리적 분절을 가하기도 한다. 또한 무대 뒤쪽에 스크린을 세워 배경영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채로운 무대장치는 동일한 좌표에 위치한 무대공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얻게 한다. 특히나 경사진 언덕을 무대로 사용한 것은 인간의 숙명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사진 언덕에서 미친 듯 춤을 추는 코러스들이 영원토록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의 운명이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대는 평생 동안 끝없이 갈등하고 대립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안티고네』의 주제의식을 무대장치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뿐만 아니라 코러스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원작의 코러스는 정확히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민 무리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한명숙의 작품에는 다양한 직업군의 시민들로 코러스를 구성함으로서 ‘시대의 목소리’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코러스 사용은 ‘집단’로서의 인간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부각시키며, 단지 설명과 상황묘사를 위한 존재가 아닌 각자 개성과 생각이 있는 개별자로서 코러스를 재탄생시키게 된다. 또한 이러한 개별자의 탄생은 개개인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이며, 인간 사이의 가치관의 대립과 갈등을 그려내고 있는 한태숙의 작품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결론적으로 한태숙의『안티고네』는 앞서 언급했듯이, 원전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이러한 차이는 결과적으로 원전의 주제의식을 강화시키는데 사용됐다는 점에서 발전적 재해석이라고 평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현대적 변용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라는 머나먼 과거의 텍스트를 현대의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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