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ELP 난장국문3.0

험난한 시대,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

임주혁 2013. 7. 31. 17:06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여러 학파 간에 경쟁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를 지배했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는 좀 더 물질적인 세계 개념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모두 거부했다. 그들에게 우주론은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윤리학의 문제에 몰두했다. 그들에게 철학은 세계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삶에 대한 추구로 이해됐다. 헬레니즘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세계주의와 보편주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이후 그리스와 중동의 철학자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모여들었으며, 이들은 다양한 형이상학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철학은 로마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고, 중세 신학으로 출현하게 됐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의 두 갈래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의 추구와 감각의 기쁨을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추기지는 않았고, 인생의 목표로 장려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아타락시아(ataraxia, 평정심)이었다. 그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순히 신체와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분해일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며, 쾌락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덕을 옹호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고 단지 평정심을 얻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는 무엇보다 우정을 좋은 삶을 위한 열쇠라고 추천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많이 닮아있다. 또한 현대의 철학자들이 우정을 그렇게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데 반해 우정을 중시한 그의 생각은 현재에도 그가 철학자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이유이다.


  또 다른 갈래인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 단일 철학으로 가장 성공적이었고 가장 오래 지속됐다. 스토아학파의 특징은 이성에 대한 거의 광적인 믿음이었다. 그들은 이성과 감정 사이에 해묵은 대립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감정은 비이성적인 판단의 형태로서 우리를 실망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들은 이성을 ‘신적인 섬광’으로 생각했는데, 이를 통해 더 큰 합리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적 이상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파테이아(apatheia, 부동심)로 정리될 수 있다. 스토아철학은 극단적 철학이었지만, 어렵고 혼란한 로마 시대에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제국 전역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이들의 금욕주의의 옹호와 비이상적으로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더 큰 합리성에 대한 통찰은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채택되기도 했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속에서 이를 문제시 삼는 회의주의로 싹텄다. 피론으로부터 시작된 회의주의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까지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스토아학파가 주장했던 이성에 대한 믿음을 포함해 어떤 종류의 믿음도 불만과 불협화음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현대의 회의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지식의 가능성과 그 정당화 문제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의 회의주의는 윤리학적 영역에 국한되어있다. 따라서 현대와 달리 이들에게 회의주의는 오히려 지혜로서 삶의 이성적인 방법이었다. 회의주의를 통해 자신을 평정심으로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이론적인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회의론과 지식에 대한 이상은 이들의 중요한 무기였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한 유명한 인물은 바로 키케로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들만의 일관된 이론체계를 유지하고 발전했으며, 회의론자들의 아카데미학파는 이러한 일관된 이론을 독단적이라고 지적하며 반대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논쟁 속에서도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이론의 일관성은 사람들에게 더 큰 의미의 확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