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직 오지 않은 푸르른 날을 꿈꾸며 -연극 『푸르른 날에』를 보고-

임주혁 2016. 5. 20. 06:49


  연극『푸르른 날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처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연인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극은 여산이 조카이자 딸인 운하의 청첩장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편지를 받은 여산은 30년 전 광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대학생이던 민호(여산)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과 친구가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자, 이들을 살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향한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급박해지고, 계엄군이 도청을 포위하게 된다. 민호는 친구를 데리고 도청을 빠져나가려고 해지만, 도청을 사수하겠다는 친구 때문에 계엄군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후 민호는 고문을 당하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친구가 간첩이었다고 거짓자백을 한다. 풀려난 민호는 고문후유증과 죄책감 때문에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애인과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출가를 선택하게 된다. 

  극은 과거의 민호와 현재의 여산을 끊임없이 대비시키고 무대 위에서 공존시키며, 당시의 상처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남아 있는 아픔을 잘 보여준다. 여산과 정혜, 여산과 민호의 끊임없는 대화는 끔찍했던 과거와 아직도 아픈 현재를 부각시켜주기 위한 장치이다. 30년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를 지니고 사는 여산과 정혜를 보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무간지옥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 이들은 과장된 행동과 대사를 통해 아픔을 가리려고 하지만, 관객들은 과장된 연기와 스토리의 부조화를 통해 이들의 아픔을 더욱 여실히 느끼게 된다.

  이 연극을 연출한 고선웅은 이 연극을 ‘명랑한 신파극’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자칫 무겁게만 다루어질 수 있는 5.18 민주화 운동을 좀 더 가볍게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관객들은 연극 내내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부채감을 느끼기 보다 한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연출은 관객들이 연극의 스토리에 몰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연극 중간 삽입되는 시는 관객들이 연극에 몰입하게 만들기 보다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관객들이 인물 간의 대화를 들으며 연극에 푹 빠져들더라도,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구호적인 시낭송은 연극에 빠져들던 관객들을 다시 이곳이 무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뿐만 아니라 시낭송은 연극의 비장미를 더해주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는 두 개의 오월 혁명이 존재한다. 총칼로 들고 일어나 정권을 탈취한 5.16군사쿠데타와 80년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피로 지킨 5.18 민주화 운동이다. 두 사건은 피로 만들어낸 혁명이라고 불린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성격은 극명하게 다르다. 5.16은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흘린 피였고, 5.18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흘린 피였다. 사람의 생명과 피는 모두 소중하지만, 피를 흘렸다고 해서 두 사건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동급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에 교과서 검정 논란을 통해 드러난 5.16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부르자는 의견은 5.18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들린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과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한 세력을 동렬에 놓는 일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 아직 푸르른 날이 오기는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에서는 여산이 딸이자 조카인 운화의 결혼식에 참석해 운화의 혼주가 되어주고, 정혜와 여산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운화의 결혼을 통해 새로운 행복을 보게 된다.  푸르른 날이 찾아온 셈이다. 이런 결말은 지금의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연극의 결말처럼 5.16을 5.18과 같은 혁명의 반열에 올리려고 하는 헛소리를 듣지 않는 날이, 과거를 제대로 인정하고 미래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 푸르른 날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