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예루살렘까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일신 사상은 이전의 종교와 비교했을 때 혁명적이고, 철학적으로 위력적이다. 바로 보편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소와 사람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적용됨을 의미한다. 서양세계의 세 주요 종교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이러한 힘을 추동력으로 삼아 발전했다.
하지만 보편성을 띈 강력한 종교인 유일신교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 왜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이다. 만약 인도와 같이 파괴신과 창조신 등 역할을 나눠가진 신들이 존재하는 다신교 신앙이었다면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불행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상정한 종교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 종교가 채택하고 있는 성서가 정녕 신의 말씀이라면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글로 적힌 성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이를 누가 해석해야 하며 다른 의미로 오독될 여지는 없는지에 대한 고민이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은 사탄의 존재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이 자신을 믿는 사람을 사탄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에 폐기된다. 만약 이를 인정하게 된다면 더 이상 신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아니고, 사탄이 신의 대적자로서 부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과 악을 신이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자신들의 믿음이 불민했기 때문에 신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한 유일신 신앙을 상정하고 있는 서양세계에서 ‘신의 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기초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세 종교가 들어선 이후, 서양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로마 철학 때까지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존재와 생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추상개념에 대한 논의가 서양 철학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기 시작한다. 바로 신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부분이 부각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