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공간 연출의 승리(윤시중,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임주혁 2013. 8. 4. 23:04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무엇도 아닌 무대연출이다. 두 장의 커튼과 조명, 음향효과, 최소한의 소품만을 이용해 한정된 무대 공간을 무한한 공간으로 구성해 내는 연출가의 연출능력은 관객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커튼을 통해 무대공간을 자르고 이어붙이는 과정에서 공간이 새롭게 구성됨으로서, 관객들은 단순히 고정된 무대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대 전체를 커튼으로 둘러 안과 밖을 구분하게 하고, 배우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돌듯 안과 밖을 뱅뱅 도는 장면은 한정된 무대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마치 한 장의 띠지를 꼬아 붙이면 무한한 뫼비우스의 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커튼에 배우가 ㄱ자로 매달려 있고, 다른 배우들이 무대의 바닥을 기며 절벽을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은, 기존의 무대 공간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함으로써 기존의 것과 다른 관점으로 무대를 이해하게 하는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단순한 소품만을 사용해 무대를 자유자재로 쓰는 연출을 보여주는 연극이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연극 『파리대왕』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진흙덩이를 사용해 비가 오는 진창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 진흙덩이를 이용하여 흙먼지가 날리는 혼란상을 표현한 점은 매우 놀라웠다. 진흙덩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시간의 변화에 따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한 가지 소품으로 두 가지의 매우 실감나는 무대효과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렬한 조명과 그림자, 음향효과로 표현되는 파리대왕의 모습과 배우들의 심리는 단순히 대사로만 전달되는 것보다 더 큰 감정의 파고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파리대왕을 거대한 그림자와 소리의 집합만으로 표현함으로서, 인물들의 감정에 내제한 야만성과 공포의 상징인 파리대왕을 더욱 세련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소설에서처럼 수많은 상징적 기호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것들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 연극은 소설을 무대에서 읽어주는 수준에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명과 무대, 소품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이 연극은 소설과 다른 새로운 창작품으로 그 생명력을 얻게 된 것이다.